밤 10시 40분. 정확히 48시간 만에 짐을 꾸리며 내립니다. '아, 드디어 도착했구나.' 동시에 손에 쥐고 있던 신문을 가방에 꾸겨 넣습니다. 외국인은 허가증이 있어야 가는 곳이라고, 들키면 바로 다음 역에서 쫓겨난다고 정보 수집을 단단히 했건만. 그 몇 푼 아끼겠다고 48시간 그 나라 사람 흉내 내느라 베이징서역에서 1위엔에 산 신문을 잘 때도 머리 맡에 두고 잤던 잉크가 고스란히 묻는 신문을 이제는 치워도 되니, 마음도 두 손처럼 홀가분해 집니다.

48시간을 쉼없이 달리던 기차

라싸 도착 하기 전의 풍경

두 달 째 이 기차를 타고 베이징-라싸를 왕복하지만, 정작 라싸 땅은 역 구내말고는 밟아본 적이 없다는 과일 팔던 청년. 5천원도 하지 않던 자동카메라로 창밖을 찍어서 고향에 계신 부모님 보내드린다는 친구. 다행히 노트북이 있어서 라싸 도착하는 동안 풍경을 사진 찍어서 CD로 구워줬더니 마지막 내리는 길에 과일을 한 주먹 쥐어주던...
(뒤에 빗자루 내리치는 친구는 외국인 색출해내는 차장)

기차가 꺼얼무(칭하이)를 지나게 되면 저렇게 생긴 산소호스를 줍니다. 기차 자체에도 산소가 계속 공급되지만 비상시를 위해. 이 때까지만 해도 고산증 뭥미?하던 때

비상 식량이 기압차로 부풀어 오르는 걸 보니 슬슬 겁이 나긴 했습니다. @_@
숨을 깊게 내쉬어 봅니다.
'산소가 부족하다 하니 숨만 잘 쉬어지네.'
어둑 어둑 우선 시내로 들어갑니다. 미리 조사해 둔 곳에 가보지만 방 잡기가 수월치 않습니다. 성수기도 아닌데 말이죠. 지나가다가 짝퉁일 확률 99%인 노스페이스 보드복을 입고 걸어가는 행인에게 물어봅니다.
나무춰(티벳어:남쵸) 청년여관
문에 들어서자 마자 이과두주 냄새가 코를 찌릅니다. '홍싱지우' 상표를 보니 이 방 누군가도 베이징에서 48시간 동안 넘어 왔나 봅니다. 사실 티벳의 개발과 보존이라는 찬반논란 속에 개통한 지 얼마 안된 칭짱철도 덕택에 버스나 비행기로만 와야 했던 이 먼 길을 침대에 누워서 편하게 올 수 있으니 사람들의 환심을 살 수 밖에요.
어디서 왔냐고 묻습니다.
제 아무리 외국이라도 나름 장기 체류(!) 했던 곳이 베이징이니 베이징에서 왔다고 했습니다. 한 친구가 허베이 출신이라고 반가운 척 합니다. '어랏, 허베이 사람들 조심해라는 말을 자주 들었지!'하며 경계를 세운지도 잠시 온갖 호기심을 태우며 친한 척을 합니다.
한국 사람임을 밝히니 옆에 있던 또 다른 팔뚝 한 가득 문신을 한, 검게 탄 청년이 '최순호', '허정무' 부터 시작해서 '박지성'까지 줄줄 읊어대며 중국 축구 선수들은 저 보하이만에 다 빠져 죽어야 한다고 열을 올립니다. 축구광인가 봅니다.

스촨성 청두에서 라싸까지 자전거 타고 온 문신 청년
그리곤 자연스레 이과두주를 돌립니다.
사실 이 곳 라싸의 해발은 이미 3500미터를 넘긴 곳이지요. 안데스 산맥을 넘던 그 날, 버스에서 삼장법사가 손오공의 못 된 버릇을 고쳐주기 위해 머리끈을 조이던 장면 밖에 생각 안나던 두통을 맛봐본 지라 도착하면 3일 꼼짝 말고 잠만 자야지 했던 계획이 한 순간에 무너지는 순간입니다.
한 잔 꺾고, 두 잔 꺾으니 '어랏, 괜찮네!'
- 내일 뭐해요?
--- 모르겠어요. 좀 쉬어야 죠.
- 에이~ 내일 우리랑 호수 가요!
--- 차 대절했어요?
-네. 샹그릴라씨는 싸게 해드릴게요!
--- 싸게요? 진짜죠? 콜!
어딘지도 모르는 호수, 술로 맺어진 우정과 싸게 해준다는 당근에 그만 넘어가고 말았죠. 보통 이렇게 차를 빌려가면 차비+입장료/N인데 입장료만 내랍니다. ^_^

자기네들은 앞으로도 올 일 많다고 봉고차도 일부러 앞좌석을 내줍니다.

가다가 일도 봅니다. 설산에서 녹아내린 빙하가 흘러가는 냇가, 온통 회색빛을 띱니다.
어랏. 5190미터라... 어제 말한 호수가 말로만 듣던 남추어(남쵸) 호수구나. 볼리비아 티티카카 호수와 더불어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호수.
표지석을 보니 흥분이 됩니다. 아직까지는 숨쉴 만 합니다. '건강하다니까!!!!'

해발 5190미터의 위엄!

천지시여. 제발 생기게 해주옵소서!!!!!!!!!!!!!!!!!!
춤도 추고, 어리광도 부려 봅니다. 사진도 찍고 장난도 쳐봅니다. 성스러운 이 호수를 보니 온갖 잡다한 생각은 다 날아가버리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호수 색 닮아 맑아지기만 합니다.

'칠수와 만수' 연극에서 배꼽 쥐며 웃었던 장면도 따라해 봅니다.
한 시간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날 지 알았다면 낯 붉어지는 저질 사진도 남기지 못했을 겁니다.
.......
샹그릴라를 부축하고 온 복수의 증인들에 따르면 갑자기 문어처럼 흐물흐물해지며 '제발 좀 도와줘요. 못 걷겠어요.'라며 기대었다고 합니다. 물론 기억은 안나지요. 아, 5190미터 기념비 앞에서 이단 옆차기 하던 용맹스런 대한의 건아의 최후.... ㅠ_ㅠ
두통과의 싸움입니다. 어떻게 형용해야 그 당시의 아픔을 표현할 수 있을런지. 그래도 배는 고팠나 봅니다. 중간에 '밥 먹으러 갈 수 있겠어요?'라는 말은 분명히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 뭐하나요. 눈도 못뜨고, 뇌를 쭉 밀어대는 기압과 싸우고 있는 판에.

산소 스프레이(??) 출처:http://www.google.com/imgres?imgurl=http://photos.travelblog.org/Photos/5325/58864/t/342757-In-need-of-oxygen-0.jpg&imgrefurl=http://www.travelblog.org/Asia/China/Tibet/Lhasa/blog-58864.html&usg=__ujm4FAozhRZafupyMcVEhX4mol4=&h=225&w=300&sz=13&hl=ko&start=66&zoom=1&tbnid=j6zkfE4BVnlyqM:&tbnh=145&tbnw=195&prev=/images%3Fq%3Dtibet%2Boxygen%26um%3D1%26hl%3Dko%26sa%3DN%26biw%3D1024%26bih%3D485%26tbs%3Disch:10,2587&um=1&itbs=1&iact=hc&vpx=371&vpy=133&dur=501&hovh=179&hovw=238&tx=98&ty=120&ei=czGkTN3HIIKclgeT7NT2Cw&oei=cDGkTPGIGYaBlAf3rp3KCw&esq=4&page=8&ndsp=8&ved=1t:429,r:1,s:66&biw=1024&bih=485
사실 시내에서 산소 스프레이(에프킬라처럼 생겼죠) 파는 것을 보고 '피식~' 웃었는데.
눈을 살짝 떠보니 벌써 주변엔 네 통의 산소 스프레이가 보입니다. 한 통에 25위엔이나 하던데...
목이 말라옵니다. '물 좀 주세요.'
앗 물이 달작지근 합니다. 고로쇠 수액처럼.
그나저나 누가 지금 물을 주고 있지? 이제야 서서히 정신이 드나봅니다.
'누구세요?'
'샹그릴라. 나 리지에야!'
아이고 허베이에서 온 리지에 아닌가? 티벳까지 왔는데 여행비가 부족해 남들은 다 가보는 에베레스트산 베이스 캠프도 못가고, 싼 값에 봉고차 빌렸다길래 그래도 호수는 보고 간다고 좋아했던 리지에 아니던가?
'가서 호수에서 좀 놀지 샹그릴라 때문에 미안해.'
'내일 아침에 보면 되니까 얼른 이 것 마셔'
포도당이 가득 담긴 컵을 연거푸 입에 넣어줍니다.
'리지에! 이 장면 사진 찍고 싶어!'

좌 리지에 / 우 샹그릴라
다행히 그 날 그 쇼를 하고 나니 빨리 고산에 적응되었습니다. 그 뒤 해발 6000미터를 넘는 곳에 가서도 쌩쌩하니 지냈으니 말입니다. 에베레스트산 베이스캠프에서는 노숙도 했; -ㅅ-

고산증은 생각보다 무서운 고통이 따르는 증세입니다. 중국 스촨 따오청. 산길에 오르다가 산소부족으로 실려 내려오는 관광객이 부지부수입니다.
몇가지 약도 있지만 최고의 방법은 고산지대를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 방에 완쾌!!!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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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창 밖으로 니아오차오(베이징 올림픽 주경기장) 철골대가 보입니다. 내년이면 세계의 이목이 저 곳에 모이겠구나 생각하니 새롭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예전 살던 곳 근처라 더욱 더 가슴이 두근 두근.
하지만 더 가슴 뛰는 일이 곧 생길 겁니다. 바로 리지에를 만나러 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퇴근 길 한 시간 반이 넘게 버스에 지하철을 타고 올 그 친구를 생각하니 '숙소로 찾아올테니 먼 길하지 말라'라는 부탁도 손님의 신분을 망각한 채 그냥 집 앞으로 가겠다 했습니다. 사실, 얼마 전 결혼하고, 또 애를 낳은 리지에 부인을 보고 싶어서였습니다. 아직 몸이 덜풀려 장거리 출타를 못하니 이 샹그릴라 짱돌 굴린 거지요.
어랏, 탕수육 좋아한다고 노래를 불렀는데 아직까지도 기억을 하고, 주인장! 목청껏 불러 우선 탕수육 먼저 내달랍니다. 2년 전 잠시 스치듯이 이야기 했는데...

나이도 어린 놈이 벌써 장가를 가 버렸;;; OTL
그리곤 또 세월이 흘렀네요.
어쩌면 블로그나 일기장 한 페이지 감 밖에 되지 않는 친구이야기를 공개 게시판에 쓰는 이유는...
이제 곧 셋을 만나러 가기 때문이죠.
베이징 공항에 비단 융단 깔고 처자 한 명 대령하고 각잡고 있으라 했는데...
벌써부터 가슴이 떨립니다.
아, 이 뛰는 심장은 농담 삼아 이야기한 처자 때문이 아니라, 전화기 사이로 외치던 '한구어 슈슈 니하오!(한국 삼촌 안녕하세요!)'라고 외치던 이 꼬마 친구를 본다는 생각 때문이지요. 홍홍홍

밤새 포도당 먹여주던 리지에!!! 샹그릴라가 태평양 건너간다! 술 상 봐놔라!!!!
사진 무단 도용 금지입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