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4. 13.
좋아하는 이성을 만난다는 것이 언제부터인가 자연스럽지 못하고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움직임을 느낀 순간이라 인식되어져 버린다면, 그것은 아마도 만난 그 날짜를 억지스레 메모하고 기억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런 사심 없이 만난 인연의 날짜가 잘 기억나지 않는 것은 기억력이 부족하다는 변명으로만 감싸기에는 너무 늦어버린듯한 자연스러움 때문일지도 모르겠네요.
망망대해를 쉼없이 달려 온 배와 선원들에게 잠시 숨 고르며 다음 항해를 준비하게 해주는 그 앵커(anchor). 그 어떤 파도에도 흔들리지 않음은 아마 그 뜻이 뉴스를 보도하며 흔들리지 말라는 선인들의 깊은 뜻이 담겨있을 거라 믿습니다.
자유와 민주, 약자를 위해 서왔다는 사명감을 가진 한 앵커의 인사는 일년 전 매일 9시를 지키겠다는 첫 인사의 목소리와 같았고, 옆 동료가 언론 장악의 쇠사슬 앞에서 밥줄을 놓고 투쟁했던 그 날도 짝 잃은 원앙새의 슬픔 없이 담담한 목소리와도 같았습니다.
대중성과 선도성이라는 양날의 검에서 객관성 혹은 중립이라고 일컫는 언론의 자세는 어찌보면 유토피아처럼 정의되지 않은, 그 어떤 정밀한 기계로라도 잴 수 없을 정도의 좌우를 넘나드는 일이겠지요. 사람이 하는 일이니까요.
작금과 같이 정보의 습득이 쉽지 않던 시절 그 앵커는 자연스럽게 눈에 익숙해지기 시작했지요. 어떤 기자는 특이한 마무리로, 어떤 기자는 특이한 외모로 주목을 끌고 있을 때, 그 기자는 차분한 느낌이라는 것 외에는 그리 특출나지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바바리 코트를 입고 워싱턴에서 팍스아메리카나의 모습을 보여주더군요. 사실 그 짧은 시각에 많은 내용을 전하기 위해서는 그가 촉망받는 기자라 할지라도 많은 양을 분출해 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언론 종사자들은 비유와 상징 등을 통해서 촌철살인을 많이 하곤 하죠.
누구는 어디어디 출신이다라는 말을 하기 좋아하는 사람으로부터 정동영씨와 고교 동기 동창이고, 대학도 같은 곳, 심지어 직장도 같은 곳인 그의 사적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와 함께 막역한 사이라는 관계라는 것도... 그 순간 한창 앵커와 기자들이 정치권에 물밀듯이 치고 나가는 그 시절, 달콤한 사탕 하나 건네졌을 법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대선까지 나왔고, 딱부러진 멘트가 인상적이었던 여성 기자와 직장 동료 몇을 같이 끌고 간 정동영씨가 그 사람을 그냥 둘리 없었겠고, 그는 분명 정치의 뜻이 없음을 확고히 했겠지요.
그 시절 고등학교 동기에 성적은 반에서 수위를 다퉜겠고, 인문계에, 대학 고교 동창회에서도 막걸리 돌려가며 향수를 그리워했을, 말 그대로 죽마고우가 손을 내밀었을 때 그는 아마 곤혹스럽지만, 또한 서로를 그 만큼 잘 알기에 현명하게 고사를 했겠죠.
같은 방송국에 일하는 최철구 앵커가 해학과 유머로 세상을 꼬집을 때 그는 정제된 언어와 날카로운 눈빛으로 세상의 부정을 꼭 집어내고, 아낌없이 비판을 하며 '함께 잘 사는 세상'을 마지막 멘트에 남기곤 했던 기억.
오늘이 마지막이었네요. 아, 마지막이라고 단언하기에 안타까움과 아쉬움이 한가득이지만 그 더러운 세상 꼴을 이제는 억지스레 잔잔함과 담담함으로 아나운서용 목소리를 듣지 않게 되어 다행일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설왕설래하기 좋아하는 똥 냄새보다 더 추악한 몇 언론과 정치권은 그에게 고향 땅 출마라는 곶감을 던졌다며 그의 행보를 가십화하기도 했지만, 그는 역시나 현명한 길을 걸었네요. 만약 그 검은 손길을 잡았다면 '역시나'하는 탄식과 벗과 격돌하는 코미디 한 장면을 봤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덕분에 이 세상 순진하게 살아서는 안되겠다고 다시금 곱씹을 때가 많았습니다. 잃어버린 휴대폰을 찾고 나서 '아, 세상은 살만하구나'라는 기쁨이 어리석었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셨네요. 배우지 않고, 행동하지 않고,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고 살다간 크게 당한다는 2009년 대한민국의 모습을 당신 덕택에 제대로 공부했습니다.
마지막 부탁이 있다면 부디 고향 친구처럼 정치에는 발을 담구지 아니하셨으면 좋겠네요. 윗대가리들의 간접 살인으로 쫓겨난다면, 아니 '더러워서 못해 먹으시겠다'라고 생각이 든다면, 그 악취나는 곳을 버리고 차라리 배움의 열정이 가득한 캠퍼스로 가시는 건 어떨런지요? 성실히 노력하고, 지식이 풍부할 언론고시를 준비하는 후배들은 입으로는 깨끗한 언론사에서 소신껏 정론직필해야지 다짐했다가, 결국엔 어중이 떠중이 뽑아주는 회사에서 사주의 콧김에 우르르 쓰러지는가 하면 성악설이 정설이라고 외치는 듯 썩어가고 있네요. 기자실에서 특종을 송고하고, 진실를 발굴하며, 관련자들과의 진실캐기 싸움을 벌여야 할 후배들이 검찰청 문 앞에서 새벽 이슬 맞으며 '회장님 화이팅'을 외치고 있으니까요. 자존심은 꺾어져 버려도 양심을 담은 펜대는 꺾지 말아야 할 사명감을 지녀야 할 당신의 후배들은 갈대보다 더 쉽게 저항하지 않고 스스로 고꾸라져 버리네요. 지식을 지혜로 발전시키지 못할 망정...
재차 부탁하건데 가능하다면 부디 배움터로 가셔서 언론을 꿈꾸는 때 뭍지 않은 청춘들에게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낙인 찍혀 백수가 될 지언정 최종 면접장에서 언론을 자신의 권력으로 이용하는 자들 면전에서 '여론을 오도하고, 국민의 입과 귀를 마음대로 조작하며, 언제까지 있는 자를 위해서 살 겁니까?'라고 당당하게 쓴소리 할 줄 아는, 자신의 혼을 바칠 수 있는 양심있는 인재를 키워주시면 정말 고맙겠습니다. 무리한 부탁이 아니길 소원해 봅니다.
또한 부탁 드립니다. 당신의 생각과 행동했던 것을 역사에 남기기 위해서는 결코 혼자 삭이지 마십시오. 그 손 떼 뭍은 데스크에서 하고자 했던 이야기들 꼭 세상 사람들에게 들려주세요. 귀 열고 눈 똑바로 뜨고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러신다면 뇌세포가 무뎌져 '내 귀에 도청장치'의 난세를 초연히 극복한 그 유명한 앵커의 활약이 잊혀질지라도 당신만은 뼈 속에 새겨놓고 찬송하렵니다.
2009년 4월 13일 월요일. 보도국 데스크에서는 속끓는 마지막 클로징이 되었지만 당신의 인생에서는 화려한 오프닝이길 바랍니다.
신경민 앵커 무운을 빕니다. 건강하십시오. 사랑합니다.
http://imnews.imbc.com/mpeople/anchor/1511243_3732.html
회사 결정에 따라서 저는 오늘 자로 물러납니다. 지난 일 년여, 제가 지닌 원칙은 자유, 민주, 힘에 대한 견제, 약자 배려, 그리고 안전이었습니다.
하지만 힘은 언론의 비판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아서 답답하고 암울했습니다. 구석구석과 매일 매일, 문제가 도사리고 있어 밝은 메시지를 전하지 못해 아쉬웠지만, 희망을 품은 내일이 언젠가 올 것을 믿습니다. 할 말은 많아도 제 클로징 멘트를 여기서 클로징하겠습니다.
좋아하는 이성을 만난다는 것이 언제부터인가 자연스럽지 못하고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움직임을 느낀 순간이라 인식되어져 버린다면, 그것은 아마도 만난 그 날짜를 억지스레 메모하고 기억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런 사심 없이 만난 인연의 날짜가 잘 기억나지 않는 것은 기억력이 부족하다는 변명으로만 감싸기에는 너무 늦어버린듯한 자연스러움 때문일지도 모르겠네요.
망망대해를 쉼없이 달려 온 배와 선원들에게 잠시 숨 고르며 다음 항해를 준비하게 해주는 그 앵커(anchor). 그 어떤 파도에도 흔들리지 않음은 아마 그 뜻이 뉴스를 보도하며 흔들리지 말라는 선인들의 깊은 뜻이 담겨있을 거라 믿습니다.
자유와 민주, 약자를 위해 서왔다는 사명감을 가진 한 앵커의 인사는 일년 전 매일 9시를 지키겠다는 첫 인사의 목소리와 같았고, 옆 동료가 언론 장악의 쇠사슬 앞에서 밥줄을 놓고 투쟁했던 그 날도 짝 잃은 원앙새의 슬픔 없이 담담한 목소리와도 같았습니다.
대중성과 선도성이라는 양날의 검에서 객관성 혹은 중립이라고 일컫는 언론의 자세는 어찌보면 유토피아처럼 정의되지 않은, 그 어떤 정밀한 기계로라도 잴 수 없을 정도의 좌우를 넘나드는 일이겠지요. 사람이 하는 일이니까요.
작금과 같이 정보의 습득이 쉽지 않던 시절 그 앵커는 자연스럽게 눈에 익숙해지기 시작했지요. 어떤 기자는 특이한 마무리로, 어떤 기자는 특이한 외모로 주목을 끌고 있을 때, 그 기자는 차분한 느낌이라는 것 외에는 그리 특출나지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바바리 코트를 입고 워싱턴에서 팍스아메리카나의 모습을 보여주더군요. 사실 그 짧은 시각에 많은 내용을 전하기 위해서는 그가 촉망받는 기자라 할지라도 많은 양을 분출해 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언론 종사자들은 비유와 상징 등을 통해서 촌철살인을 많이 하곤 하죠.
최대의 방송사가 정권의 입맛에 맞춰 바꿔진다는 사실을 알고 부터는 그 앵커가 일하는 방송국의 뉴스를 많이 보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마지막 멘트에서 말한 '없는 자'를 위한 보도가 타 채널에 비해 많이 느껴져서 그랬을지도 모르지요.
누구는 어디어디 출신이다라는 말을 하기 좋아하는 사람으로부터 정동영씨와 고교 동기 동창이고, 대학도 같은 곳, 심지어 직장도 같은 곳인 그의 사적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와 함께 막역한 사이라는 관계라는 것도... 그 순간 한창 앵커와 기자들이 정치권에 물밀듯이 치고 나가는 그 시절, 달콤한 사탕 하나 건네졌을 법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대선까지 나왔고, 딱부러진 멘트가 인상적이었던 여성 기자와 직장 동료 몇을 같이 끌고 간 정동영씨가 그 사람을 그냥 둘리 없었겠고, 그는 분명 정치의 뜻이 없음을 확고히 했겠지요.
그 시절 고등학교 동기에 성적은 반에서 수위를 다퉜겠고, 인문계에, 대학 고교 동창회에서도 막걸리 돌려가며 향수를 그리워했을, 말 그대로 죽마고우가 손을 내밀었을 때 그는 아마 곤혹스럽지만, 또한 서로를 그 만큼 잘 알기에 현명하게 고사를 했겠죠.
같은 방송국에 일하는 최철구 앵커가 해학과 유머로 세상을 꼬집을 때 그는 정제된 언어와 날카로운 눈빛으로 세상의 부정을 꼭 집어내고, 아낌없이 비판을 하며 '함께 잘 사는 세상'을 마지막 멘트에 남기곤 했던 기억.
오늘이 마지막이었네요. 아, 마지막이라고 단언하기에 안타까움과 아쉬움이 한가득이지만 그 더러운 세상 꼴을 이제는 억지스레 잔잔함과 담담함으로 아나운서용 목소리를 듣지 않게 되어 다행일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설왕설래하기 좋아하는 똥 냄새보다 더 추악한 몇 언론과 정치권은 그에게 고향 땅 출마라는 곶감을 던졌다며 그의 행보를 가십화하기도 했지만, 그는 역시나 현명한 길을 걸었네요. 만약 그 검은 손길을 잡았다면 '역시나'하는 탄식과 벗과 격돌하는 코미디 한 장면을 봤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덕분에 이 세상 순진하게 살아서는 안되겠다고 다시금 곱씹을 때가 많았습니다. 잃어버린 휴대폰을 찾고 나서 '아, 세상은 살만하구나'라는 기쁨이 어리석었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셨네요. 배우지 않고, 행동하지 않고,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고 살다간 크게 당한다는 2009년 대한민국의 모습을 당신 덕택에 제대로 공부했습니다.
마지막 부탁이 있다면 부디 고향 친구처럼 정치에는 발을 담구지 아니하셨으면 좋겠네요. 윗대가리들의 간접 살인으로 쫓겨난다면, 아니 '더러워서 못해 먹으시겠다'라고 생각이 든다면, 그 악취나는 곳을 버리고 차라리 배움의 열정이 가득한 캠퍼스로 가시는 건 어떨런지요? 성실히 노력하고, 지식이 풍부할 언론고시를 준비하는 후배들은 입으로는 깨끗한 언론사에서 소신껏 정론직필해야지 다짐했다가, 결국엔 어중이 떠중이 뽑아주는 회사에서 사주의 콧김에 우르르 쓰러지는가 하면 성악설이 정설이라고 외치는 듯 썩어가고 있네요. 기자실에서 특종을 송고하고, 진실를 발굴하며, 관련자들과의 진실캐기 싸움을 벌여야 할 후배들이 검찰청 문 앞에서 새벽 이슬 맞으며 '회장님 화이팅'을 외치고 있으니까요. 자존심은 꺾어져 버려도 양심을 담은 펜대는 꺾지 말아야 할 사명감을 지녀야 할 당신의 후배들은 갈대보다 더 쉽게 저항하지 않고 스스로 고꾸라져 버리네요. 지식을 지혜로 발전시키지 못할 망정...
재차 부탁하건데 가능하다면 부디 배움터로 가셔서 언론을 꿈꾸는 때 뭍지 않은 청춘들에게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낙인 찍혀 백수가 될 지언정 최종 면접장에서 언론을 자신의 권력으로 이용하는 자들 면전에서 '여론을 오도하고, 국민의 입과 귀를 마음대로 조작하며, 언제까지 있는 자를 위해서 살 겁니까?'라고 당당하게 쓴소리 할 줄 아는, 자신의 혼을 바칠 수 있는 양심있는 인재를 키워주시면 정말 고맙겠습니다. 무리한 부탁이 아니길 소원해 봅니다.
또한 부탁 드립니다. 당신의 생각과 행동했던 것을 역사에 남기기 위해서는 결코 혼자 삭이지 마십시오. 그 손 떼 뭍은 데스크에서 하고자 했던 이야기들 꼭 세상 사람들에게 들려주세요. 귀 열고 눈 똑바로 뜨고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러신다면 뇌세포가 무뎌져 '내 귀에 도청장치'의 난세를 초연히 극복한 그 유명한 앵커의 활약이 잊혀질지라도 당신만은 뼈 속에 새겨놓고 찬송하렵니다.
2009년 4월 13일 월요일. 보도국 데스크에서는 속끓는 마지막 클로징이 되었지만 당신의 인생에서는 화려한 오프닝이길 바랍니다.
신경민 앵커 무운을 빕니다. 건강하십시오. 사랑합니다.
http://imnews.imbc.com/mpeople/anchor/1511243_3732.html
회사 결정에 따라서 저는 오늘 자로 물러납니다. 지난 일 년여, 제가 지닌 원칙은 자유, 민주, 힘에 대한 견제, 약자 배려, 그리고 안전이었습니다.
하지만 힘은 언론의 비판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아서 답답하고 암울했습니다. 구석구석과 매일 매일, 문제가 도사리고 있어 밝은 메시지를 전하지 못해 아쉬웠지만, 희망을 품은 내일이 언젠가 올 것을 믿습니다. 할 말은 많아도 제 클로징 멘트를 여기서 클로징하겠습니다.